나오미와 가나코
‘나오미와 가나코’는 일본 최고의 이야기꾼이라 칭송 받으며 ‘공중그네’, ‘마돈나’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오쿠다 히데오의 신작 장편소설이다. 이번 작품은 서스펜스 물로 남편의 무자비한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가나코와 그의 친구 나오미가 도피할 수 없는 현실의 탈출구로 극단적인 방법을 택해 차근차근 실행해나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크게 나오미 편과 가나코 편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처음 생각했을 땐 각각의 시점에서 하나의 사건을 바라볼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예상과는 달리 각각의 시선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행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오미 편에서는 주요인물들이 등장하고 그 인물들에 대한 성격, 주변환경 그리고 사건의 발단과 결말 등이 주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 자체적으로 한편의 소설이 마무리되는 느낌이지만 뒤에 이어지는 가나코 편에 비해 비교적 덤덤하고 예측 가능한 평이한 느낌의 독서를 할 수 있다. 흡사 전문 코스 요리를 취급하는 레스토랑에서 에피타이저와 전체요리를 맛보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하지만 충분히 먹었기 때문에 그다지 기대가 되지 않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한 가나코 편에서는 오쿠다 히데오가 왜 일본에서 최고의 이야기 꾼으로 통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나오미 편에서의 결말은 끝나지 않은 결말이었으며 가나코 편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은 스릴서 영화를 볼 때 만끽할 수 있는 긴장감의 고조를 그 어떤 효과음이나 자극적인 영상의 도움 없이 그대로 느끼게 헤 준다. 말 그대로 지루할 틈 없이 가슴 졸이며 손에 땀이 흥건하게 맺힐 정도의 긴장감을 마지막 페이지의 마지막 단락까지 느끼게 해주었다. 결코 적지 않은 긴 분량의 장편소설을 이리도 재미있고 흥미진진하게 이끌어준 작가의 노고에 엄지손가락이 절로 추켜세워 진다.
취향이나 해당 장르의 깊이 있는 독서 등의 차이로 호불호는 갈리겠지만, 책 한 권을 들고 가슴에 비트를 새겨볼 수 있는 즐거움을 선사할 책이므로 기회가 된다면 꼭 읽어보길 추천하는 바이다.
오베라는 남자
나와 세상을 이어주는 끈이 단 하나밖에 없다면?
그리고 그 끈이 끊어져 버렸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전형적인 외골수 캐릭터인 오베는 확고한 원칙주의자 이며 본인의 신념과 틀린 사람들을 모두 인정하지 않고 외압에 타협하지 않는 강하면서 거친 인물이다. 순탄하지 않은 유년시절을 거치며 산전수전을 겪게 되지만 순수함을 잃지 않고 살아온 덕분인지 본인만을 사랑해주는 아름다운 배우자를 만나 행복한 결혼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행복한 시절도 찰나일 뿐, 아내가 임신한 상태로 떠난 스페인 여행에서 음주운전을 한 버스기사 탓에 교통 사고를 당하게 된다. 사고로 아이를 잃고 아내마저 하반신 불구가 되어 또 한번 크나큰 좌절을 맛보게 되는데, 그래도 아내가 살아 있음에 감사하며 불운의 인생을 인고하며 40여년을 살아오게 된다. 이후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더 이상 미련을 둘 필요 없는 세상에 작별을 고하기 위해 나름 철저하게 준비하여 실행에 옮겨 보지만 새로 이사온 이웃집 사람들과 본의 아니게 얽히게 되어 번번히 실패하게 된다.
이야기는 오베가 세상과 결별하기로 마음먹고 실행에 옮기려 할 때 즈음에, 옆집에 새로운 이웃이 이사를 오게 되면서 생기는 수많은 해프닝 위주로 구성된다. 독특한 구성원에 식구도 많은 이 새로운 이웃은 모든 것에 서투르며 본의 아니게 끊임없이 오베의 계획을 망쳐놓게 된다. 그를 모르는 입장에서는 오베가 성질 고약한 욕쟁이 할아버지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을 진데, 이상하게도 새로운 이웃들은 편견 없이 그를 대하고 또 그와 그들의 생활에 조금씩 서로를 밀어 넣고 종국에는 오베에게 지금까지의 그와는 다른 그의 면모를 보여줄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게 된다.
아주 특별할 것 없는, 어쩌면 식상할 수 도 있는 스토리이지만 오베의 이야기가 유쾌하고 가슴 따뜻한 이야기 일 수 있는 것은 아무래도 스토리텔러가 구성한 짜임새 있는 이야기 구조와 전개 그리고 등장 인물들의 신랄한 대화 등이 큰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다. 고집불통 캐릭터인 주인공 오베는 더 이상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적어진 지금의 세대와 또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가려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뒤돌아 볼 수 있는 거울 같은 존재로 인식할 수도 있으며, 더 이상 살갑게 어울릴 수 없는 우리 이웃들과의 관계 또한 되돌아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는 점에서 그냥 가볍게 웃어넘길 수 만은 없는 이야기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삼쾌(유쾌, 상쾌, 통쾌)한 이야기를 피곤함 없이 읽어볼 분들에게 추천하는 바이다.
필요한 사람인가
‘필요한 사람인가’는 공자의 이상주의와 마키아벨리의 철저한 현실주의를 오가는 세 명의 17세기 유럽 사상가들의 통찰을 바탕으로 좋은 사람보다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이 비정한 세상에서 현명하게 살아남는 방법이라고 주장하는 책이다. 철저하게 현실적이고 실리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관조하는 세 명의 사상가들은 ‘너무 착하지도, 그렇다고 악하지도 않게, 그대로의 나인 채로 살아가라’고 말한다. 위선의 시대, 혼돈을 피할 수 없다면 어떻게 그것과 더불어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17세기를 살았던 세 현자들의 잠언 속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17세기 유럽에는 음모와 배신, 정치적 모략, 함정, 암살, 내전이 끊이지 않던 시절이었으며 지금이나 그 때나 표면에 드러나는 양상만 다를 뿐 여전히 힘든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21세기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유효한 내용이지 않을까 싶다.
‘좋은 사람’보다 ‘필요한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책에서는 어떻게 나를 지켜낼 것인지 먼저 고민하고, 자신을 확실히 지켜내면서 세상과 조화를 이루어 낼 수 있도록 하여 결국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지 결정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부러진 손가락을 드러내면 적의 공격이 그 손가락에만 집중된다. 그러니 아무리 작은 허점이라도 함부로 드러내지 말라. 악의를 가진 사람들은 당신의 약한 곳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낙담했더라도 내색하지 말라. 사람들은 그것을 빌미로 당신을 조롱거리로 삼으려 할 것이다. 지혜로운 이는 약한 곳을 절대 드러내지 않으며 적의 공격을 받아도 태연하게 대처한다.’ – 그라시안
우리는 감출 때와 드러낼 때를 알아야 한다. 심계(深計)가 있는 사람치고 자기 의향을 드러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남다른 능력은 치명적 약점과 샴쌍둥이처럼 붙어 있다. 백전노장들이 자신의 능력을 적당히 보여주고 감추고 하는 것은 그로 인해 약점 또한 드러날 수 있기 때문에 경계하는 것이다.
‘친구가 행복하게 되었다는 소식에 우리가 기뻐하는 것은 선량함도 아니고 우정 때문도 아니다. 이번에는 우리가 행복하게 될 차례가 왔다든가, 또는 친구의 행운 덕으로 뭔가 좋은 일이 있겠지 하고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자기애 때문이다.’ – 라 로슈푸코
무엇이든 내줄 수 있는 격한 우정보다 편안한 우정이 안정적이며, 많을 것을 줄 필요도 없고, 많은 것을 바라지도 않는 정도의 관계가 누구에게나 허용되며 그 관계를 애써 망치지 않는다면 그것도 행운이라는 생각이다.
‘인생이란 느끼는 사람에게는 비극인 반면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희극이다.’ - 라 브뤼예르
위 문장은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포괄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성적 판단이 우리 인생을 지켜줄 것이며 감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현실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인 것 같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같이, 초현실적인 생각들은 감성의 저편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으나 감정적으로 쉬이 받아들여지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본인 또한 현실과 이상의 중간지점을 끊임없이 타진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한쪽으로 치우치는 순간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쉬이 공감할 수 없는 부분도 있으며 격하게 고개를 끄덕거린 부분도 있었다. 어찌되었건 우리는 혼자서만은 살 수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많게든 적게든 서로 영향을 주고 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니, 본인 스스로와 상대방에게 소중한 사람 그리고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가 세상으로 나온 사명 중 가장 중요한 사명이지 않을까 싶다. 아래 그라시안의 마지막 잠언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단초를 찾아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아름답고 풍요로운 삶을 위해 인생 1막은 죽은 사람들과 대화를 즐겨라. 고전에 힘입어 우리는 더 깊이 있고 참다운 인간이 된다. 인생 2막은 살아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세상의 좋은 것들을 즐겨라. 조물주는 우리 모두에게 재능을 골고루 나누어주었고, 때로는 탁월한 재능을 평범한 사람들에게 주었다. 그들에게서 다양한 지식을 얻어라. 인생3막은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서 보내라. 행복한 철학자가 되는 것만큼 좋은 인생은 없다.’ – 그라시안